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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7월9일 구약개관설교(145)잠언 (2)유은산
정효선 2015-07-25 23:06:07 77

구약개관설교(145)

잠언 (2) : 잠언 9:10

 

1. 현실의 삶을 뛰어 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스스로 겸손함의 자세

* 지혜가 실천적 원리로 중요하지만 그 지혜자체를 의지하지 않는 삶의 자세

잠언 16:9,19:21,20:24,21:30-31

 

2. 최고의 지혜로운 자의 결론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 지어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 (9:10)

: 경외하는 마음이 그 다음의 참된 깨달음과 지식을 가져다준다.

* 여호와 경외함의 구체적인 케이스의 적용

: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 금령의 의미

 

3. 미련한 자의 삶의 특징 (미련함은 지성의 결여가 아니다. 못 배운 사람이 아니

다)

* 외부적: 훈계를 싫어하고 징계를 무시함 (1:7 , 10:17 , 12:15 ,15:5)

* 내부적: 자제력의 결핍, 말의 절제가 어려움(10:8 , 10, 14, 12:16,15:2,16:27

29:20)

* 이런 자의 삶의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5:23)

* 미련한 자와 함께 일할 수밖에 없을 때 매우 조심하라(17:12)

* 여호와 경외 대신에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미련한 자의 삶(28:26)

 

결론: 자신의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련한 자의 길로 가는가? 지혜의 길로

가느냐?를 양자 선택하는 것이다. 그 두 길의 차이는 결국 자신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차이이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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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9:10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교 안을 보면 구약 전체의 제목이 “구약개관” 설교라고 되어 있고 145회째이다.

그리고 앞으로 잠언 두 번만 더하면 이제 “구약개관” 설교를 끝낸다.

그래서 그것이 끝나고 나면 10년에 걸쳐서 수요예배를 계획을 했던 것이 일단계가

마무리 된다.

처음에는 성경의 100대 사건으로 쭉 해오다가 100 대 사건 설교가 끝난 다음,

두 번째는 “신약개관”설교라고 그래서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마태복음을

몇 번 나누어서, 마가복음도 몇 번 나누어서 셩경을 쭉 훑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쭉 훑으면서 지금은 마지막

지혜서에 우리가 와 있다. 그래서 이것을 다 마치고 나면 이 3 개를 몽땅 U.S.B에

담아 비매품으로 만들어서 차를 타고 다니면서, 혹은 컴퓨터에서도 들으시고,

그래서 성경말씀에 익숙하도록 같이 진행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구약개관”설교를 마치고 나면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원리들이 있다. 그래서 체계를 잡는, 뼈대를 잡는 그런 내용들을 수요예배 때

계속 진행하려고 한다.

말씀을 굳이 이렇게 드리는 이유는 말씀을 하나하나 부분적으로 먹지만 전체적으로

어떤 큰 그림 속에서부터 지금 이 말씀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차근차근, 또

지나간 말씀들을 그냥 흘리지 말고 다시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때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래서 말씀이 어느 날 들려오다가

들려오는 말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말씀이 막 움직여서 내 삶을

조정해 나가는 그런 자리에까지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에 푹 젖어 있는 게 바로 잠언이다..

 

이렇듯 누누이 말씀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냥 소개를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창조부터

마지막까지 이루시는 가에 푹 젖어서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익숙한 사람이 낳은

자연스러운 삶의 지혜와 철학들이 잠언의 말씀으로 이렇게, 저렇게 때로는

지혜의 구절로, 그러나 그 배경을 쫓아가 보면 이런 질서와 이런 내용은 다른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신 질서를 깨닫고 그 질서에 순종하면서 나가는

삶의 모습이 이 땅에서 진정한 지혜로운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 사업하는 것, 가정을 꾸리는 것, 이러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질서의 구현인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말씀하신 그런 원리를 따라서 살면 그로 말미암아 다르게 사는 사람들 하고 엄청나게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특별히 건강과 기도하는 부분, 그리고 건강과 치료할 때에 의사들에게 갈 때,

어떤 마음으로 가야하는 지를 잘 정리해 놨다. 그게 이 잠언서 에서 계속해서

나오는데 간단하게 설명을 해 보자면 예를 들어 뼈가 부러졌다하자 정형외과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러진 뼈를 서로 잘 맞추어 놓는 것까지가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뭐냐, 그 뼈에서 칼슘이 나와서 뼈를 붙이는 것은 그 생명력이 유지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돼야, 즉 우리 몸을 만들 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내부치유 능력이 작동되어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엄밀하게 따지면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냐,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질서를 찾아서 그 질서에 맞게 거기까지

순종하는 거다. 일종의 만들어 놓은 질서의 순종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공부도 , 모든 과학도 마찬가지다. 정당한 의미에 있어서의 좋은

모든 질서들은 그냥 만들어진 질서가 아니다. 그것을 만든 이의 뜻이 있고 계획을

따라서 질서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지혜롭게

그것을 잘 발견해서 따라가면 의인이든, 악인이든 하나님이 그 복을 받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 법칙이 어떻게 작동되고 왜 작동되는지를 알고 아하!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셔서 사람의 인체를 만들 때 이렇게 회복되도록 했으니까 의사의 한계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을 모르는 의사인데 원칙을 잘 맞추어 하는 의사

에게 시술을 받고 싶으냐? 다른 하나는 신앙은 좋은 의사인데 별 실력은 없는 의사에게 가서 시술을 받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다. 물론 신앙도

실력도 좋은 의사를 선호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신앙이란 당연히 성실하고 건강하고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한계 내에서 살아가야 된다. 그 이유는 그냥 그렇게 사니까, 인간의 한계 가운데 속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하는 길이다라는 세상적인 질서가 아니고 그 질서는

하나님이 내셨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이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그게 곧 하나님을 모르고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하고

하나님을 알고 공부하는 것은 어떻게 다르냐.

 

우리가 약을 먹을 때 뭐라고 기도하고 먹느냐? 이 약을 먹는 이유가 하나님이

나를 살릴 수 있는 그것에 맞는 좋은 약을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약이 효과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해 줄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약을 먹습니다라고 하면서 약을 먹는 사람하고 그렇지 않고 약을 먹는 사람하고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기독교의 맹신적인 잘못된 분위기 때문에 미국에서 주류 매체들이

방송사에서 의학이나 약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잘못된 결과들을

많이 심층보도를 했다. 심지어는 어떤 한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치유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세상의 의약의 치유를 거부하는 교회의 유아와 영아 사망률이 다른 지역보다 엄청나게 높았다.

수혈을 거부하는 등 하는 것들을 막 공격하다가 몇 년 전부터 조금 달라졌다.

 

기도하는 것이 과연 실제로 치유에 영향을 줄 수 있느냐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에서 3백병을 대상으로 본인에게도, 의사에게도 알리지

않고 반을 나누어서 중보기도 팀에게 맡겼다.

기도 열심히 하는 쪽의 환자들의 건강 회복 속도와 그렇지 않은 쪽과는 완전히

다르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대학보고서에 올렸다. 그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재미있는 것은 아! 사람이 마음이 평안할 때 치료의 효과와 그리고 마음 가운데

어떤 불안한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어떤 신에게 맡길 때 가지는 그 치료의

임상 결과들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실질적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지 않느냐, 스트레스 받고

신경 쓸 일이 있을 때 밥 먹으면 체하듯이 기분 좋은 사람과의 식사는 단순히 밥만

먹는 게 아니고 상대방의 사랑을 먹고 관심을 먹고, 이런 것들이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종합 집대성 해 놓은 게 잠언이다.

잠언을 열심히 읽고 , 열심히 익숙히 익히고 그 다음에 요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게 뭐냐,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런 질서들을 잘 찾아내서 우리 속에

들어오게 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질서를 잘 찾아냈는데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질서 자체에 우리가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신론과 구분되는

우리의 신앙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질서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은 하지만 그 외의 기적적인 사건이나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부인한다. 기적을 너무 많이 바라서 문제가 되지만 일단계의 기적은 규칙적으로 매일같이 해가 뜨고 지는,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 가운데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원칙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이 사실은 따져 보면 최고의 기적이다.

그런데 그것 외에 하나도 충돌되지 않게 어떤 때는 하나님이 특별하게 역사 속에서

간섭하시는 특별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두 개를 다 같이 믿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일상성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 그 마음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충성스럽게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쪽을 안 하고

기적만 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쪽만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잠언에 있는 지혜들은 매우 소중한 지혜에 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신 것이지만 이것 외에 하나님이 원하시면 특별하게 은혜와 역사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열어놔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오픈 시스템이라고 그런다. 즉 여지를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교안 1번에 나와 있듯이 현실의 삶을 뛰어 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스스로 겸손함의 자세를 가지는데 그게 뭐냐 그러니까 지혜가 실천적인 원리로 중요하지만 그 지혜자체를 의지하지 않는 삶의 자세를 가진다는 것이다. 지혜가 중요하다. 계획은 세워야 된다. 그러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열심히 살지만 이것외의 다르게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이것을 순종하는 것은 이것만으로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는 그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신 질서를 믿되 하나님 없이 그 질서만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리에 법칙을 집어넣는 것이다. 하나님이 곧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신론이라고 그런다. 신은

신인데 법칙의 신이라는 뜻이다. 인격적 창조자와 기적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의 그런 마음이 없이도 원칙만 따라가는 것을 신으로 생각한다.

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과학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우상이다.

우상이라는 것이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자기들에게 있어서는 요 법칙만 믿고 있고

이것이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면서 이렇게 빠지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역사를 우리가 익숙해 가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내가 다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성경 말씀에 익숙해져서 잘 알 수 있으나

그럴수록 더 겸손해야 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사건 외에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무수히 많고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가 없다는 근본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 19:21절에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 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 21:30-31절을 보면 “ 그 어떤 지혜도, 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

전쟁은 대비하여 군마를 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라고 되어 있다.

31절을 보면 전쟁을 대비해서 군사력을 주비했는데 양쪽을 비교해 볼 때 비교가

안될 만큼 한 쪽이 우세하다. 그래서 양편 군사력을 비교해 볼 때 당연히 예측되는

승리의 결과가 보이는데 예측 밖일 수도 있는 것은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고

우리가 마지막 부분을 주님께로 열어놓은 이것이 우리의 지혜의 가져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라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출발 지점으로 삼느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 늘 “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열어 놨다

그 다음 지식이 쌓인다는 것이다. 지혜가 쌓인다는 것이다

 

오늘의 설교 핵심이 바로 이 부분에 해당된다. 처음 지혜를 배우는 맨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지식을 배웠던 그 사건 가운데 속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가 얼마나

지식과 지혜의 채널이 되었던 지를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서 잘 볼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을 때 그들의 태도였다. 인류 역사상 맨 처음 하나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 그 사람들이었지 않느냐, 그런데 조금 어려운 얘기가 들려

온 것이다. 즉 선악과 금령의 말씀을 주시고 이것을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는

이 말씀,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기도 해서 불편할

수도 있었지만 경고의 말씀 같아서, 또 부담스러운 말씀 같기도 하고 겁나는 말씀

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소화를 해야 될 것인가, 처음 들었을 때는 감정과 생각이 아직 잘 정리가 안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자세에

따라서 그것이 지식으로 이어지느냐, 지혜로 이어지느냐 또는 멸망으로 이어지느냐가 결정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즉 경외하는 태도가 있느냐, 신뢰하는

태도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지식으로 생명의 길을 들어가든지 아니면 신뢰와 경외하는 태도가 아니면 살라고 주신 말씀이, 그 말씀을 먹고 자라라고 주신

그 말씀을 먹고 지혜를 얻으라고 주신 말씀이 오히려 올무가 되어서 사탄이 하와에게 던졌던 말처럼 너 이것 따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이 너를 시기해서 못 먹게 하는 거니까 이것 따먹어도 절대 죽지 않는다. 이렇게 사탄이 치고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뒤집어놓고 생각해 보자. 아무 것도 잘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최소한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자연스러운 마음은 어떤 마음 이였나 하면 그 말씀을

주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해서 에덴동산과 이 모든 상황들과 삶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공급해 주시고 가꾸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먼저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아담이 아하!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시고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고 이런 좋은 관계성 속애서

주셨던 말씀이었구나. 라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했더라면 그 말 자체가 조금 부정적인 말이었어도 이 말을 하신대는 뭔가 깨달으라고, 좋으라고 하셨을 텐더라는

기본 신뢰가 있을 때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 기본 신뢰하는 마음을 경외하는

마음이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 속에서의 절대적 신뢰, 피조물로서의 당연한 원래의 신뢰겠지만 단순한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성 속에서 이렇게 사랑을 베푸시고 인도하시고 꼭 필요한 말씀을 주셨을 것이니 이 말씀은 뭘까 라고 생각을 진전시키면서 왜 이것을 선악과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왜 따 먹지 말라고 했을까 라고 곰곰이 생각하는데서 지식이 쌓이는데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한계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다. 즉 하나님이 처음 만들어 놓은 생명은 죽을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안따 먹으면 계속 살 수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즉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던 아담은 가변성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생명을 결정하는 그 기준은 뭐냐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어떤 반응하느냐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과처럼 생긴 것 하나 따 먹는 것 그 내용 자체가 하나님한테는 뭐 그리 크겠느냐, 그 안에 독이 든 것도 아니고 하나의 심벌이다. 하나의 내용이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하신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것 자체가 대단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그분을 얼마나 존중히 여기는가, 그분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가,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는 잘 몰라도 이유가 있을 거야 그 마음의

태도가 제한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근본적 자세이고 그것을 성경적

용어로는 경외하는 자세라고 그런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엄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자 없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

그러니까 절대적 그 신뢰가 오늘 나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기본적 하나님에 대한 신뢰, 지금 안 풀린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약해지면 시험에 드는 것이고 강해지면 적극적인 이유를 찾아 나가서 내 마음의

방향이 죽어가는 방향으로 가느냐.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가느냐라는

결정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태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지식의 근본이 되고 출발이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배우는 지혜도 있고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지혜도 있다. 이것을 그래서 지혜서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 지혜를 붙들고

아주 철저한 상황가운데 씨름했던 그 하나님이 지금 방금 말한 경외다. 이해되지 않아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철저하게 씨름했던 사람의 한 형태가 욥의 모습이고, 욥이 처절한 고난으로

들어갔을 때 저 밑바닥의 욥, 욥이 마지막에 회개한 것은 자기가 왜 고난을

당하는지를 끝까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나중에 회개를 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모든 법칙에 내가 하나도 대답할 수 없는데 내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꼭 알아야만 하나님을 믿겠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그런 자리로 들어간 것이다.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그것은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마음이 너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가 그 입장이 대보면 아마 더 했을지 모른다. 이스라엘을 그렇게

괴롭혔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니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라 하니까 오히려 그 나라에 불을 내려주십시오 라고 하는 요나의 분냄, 결국 심판을 받아야 될 그들의 살아나는 것을 왜 기뻐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참

지혜로 들어간 것이다.

내 삶 가운데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지혜의 가장

큰 내용은 경외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나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하시고 싶어서

이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걸까 그 방향으로 초점을 모아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지식위에 지식을 주시고 지혜 위에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과정을 통과하는 이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혜를 신약으로 넘어오면 뭐라고 그러냐하면“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그런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까지 얘기를 하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 교안을 보면 그런 차원에서 그러면 지혜롭지 못한 자의 삶의 특징은

뭐냐,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미련한 자의 삶의 모습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 미련한 자의 경외하지 않는. 하나님이 이 과정을 통하여 행하실 것이 있을 것이라는 이런 최종적 신뢰와 마음을 열어놓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특징이 뭐냐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 실천적인 내용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연결되었는지를,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하시는 게 있고 인도하시는 게 있다는 것을 내가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있는데 그 말씀이 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하여

들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내 주변 사람들의 얘기하는 것을 귀를 기우리는

이유가 내 생각으로 내 인생이 살아지는 게 아니라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의 자연스런 겸손이 뭐냐,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나귀를 들어서라도 (반람 선지자처럼) 나에게 들어야 할

말씀을 하실 수 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는 훈계를 싫어하고 징계를 무시하는

형태로 미련한 자의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련한 자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훈계를 싫어하고 징계를 무시하는 형태로

미련한 자의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련한 자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훈계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마음이다.

내적으로는 자제력의 결핍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내가 하는 말에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지혜롭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의 아주 중요한 모습은 항상 여지를

두고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임을 기대하면서 내가 어떤 말을 한다할지라도 또

내가 어떤 말을 들을 때 구체적으로 내 행동 양식이 왜 이렇게 나오느냐 라고

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인식과 의식이 있을수록 내가 함부로

내 성질대로 해 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조금씩 훈련되는 과정이 사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보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련한 길로 가는가, 지혜의 길로 가는가, 하는 양자 선택이

늘 있는데 이 두 길의 차이는 결국 자신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좋은 인생이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오는 지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저런 하나님의 말씀들을

귀담아 들으면서 동시에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기에 내가 귀도 열어놓고 최종적으로 절망스럽거나 불평이나 원망이나 이런 말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지혜로운 사람은 그 말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신뢰함이 더 깊어진다면 오늘 원망하는 이 내용은 오히려 나를 사랑

하셔서 나를 만드시려는 그런 축복의 내용일 수 있는데 축복의 내용으로 주는 것을

내가 원망의 내용으로 얘기하고 있다면 참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이다

물론 고통스러우니까 그러겠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나오는 그 관점으로 보면 현재의 내 삶에 있어서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

이게 지혜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바라기로는 세상 적으로 미련한 삶의 특징이라고 해서 미련함은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또 못 배운 사람이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을 내 삶을 인도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미련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인정하심이 우리 삶 가운데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생활하면서 실제로 맛보고 경험하며 살아가서 시편 23편의 저자처럼 이런

고백이 나왔으면 좋겠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그런 삶을

살다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신앙적으로 정말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아

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부모가 되고, 조 부모가 되어서 손자 손녀들을 할머니 옆에 자꾸 두고

싶어 하는, 잔소리만 하는 게 아니라 지혜로운 말을, 정말 저 분 옆에 있으면 뭔가

다르게 나오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의 그 동행해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우리의 지혜로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 안에

풍성한, 여호와를 경외함이 서로가 풍성해지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4년7월23일구약개관설교(146)잠언(3)유은산 정효선 2015.07.27
2014년7월2일 구약개관설교(144)잠언(1)유은산 정효선 201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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